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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국사

 불국사는 지난 1995년 석굴암, 서울의 종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여행을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경주에 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경주, 아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걸출한 문화유산이다.

 불교를 나라 신앙으로 믿었던 신라인들은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건축 기법과,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정성으로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를 건설했다. 불교교리를 사찰 건축물에 잘 녹여내 이상적인 가람 배치를 이루고 있다.

 목조건축에서 쓰인다는 ‘그랭이 기법’으로 잘 짜여 진 가구식석축(보물제1745호)이 부처님의 나라를 떠받치고 있다. 석축 위에 범영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불교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수미산 정상을 의미한다.

  이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계단이 청운교와 백운교(국보제23호)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지나면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대웅전과 마주할 수 있다. 양 쪽에 대웅전을 호위하듯 선 다보탑(국보제20호), 석가탑(국보제21호)과 함께. 대웅전 서편에는 서방 극락정토의 영역,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 영역으로 오르는 계단은 청운교 백운교와 함께 국보로 지정된 연화교와 칠보교(국보제22호)이다.

 

 

2. 석굴암

 불국사와 함께 지난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우리나라 최초로 등재되었다. 삼국유사에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에 관련한 설화가 전하는데, 인생을 두 번 살았던 기구한 운명의 사내 김대성이 장차 신라의 재상이 되어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를 지었다고 한다.

  석굴암은 석굴사원이다. 석굴암 이전에도 석굴사원은 있었지만 대부분 작은 자연 석굴을 이용하거나 바위를 깎아 굴을 만들었는데, 석굴암은 부처를 모시기 위해 치밀한 설계로 건축한 인공석굴이다. 천장 돔이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밸런스를 맞출 수 있도록 돔을 이루는 돌 사이사이에 돌못을 수평으로 끼워 넣어 무게 균형과 안정감을 해결했다.탄탄한 인공돔 아래의 원실(주실)에는 신라 불교미술의 정수를 온 몸으로 보여주는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웅장한 규모이지만 한없이 자애롭고 온화한 표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본존불 바로 뒷면에는 세밀한 조각이 돋보이는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있고 돔 둘레에 작은 감실을 만들어 10개의 불상을 모셨다.

  가장 앞줄의 좌우 불상은 도굴꾼들에 의해 사라지고 8개의 불상만이 남아 있다. 감실 아래 둘레에는 앞쪽에 천부상과 보살상 4기, 뒤쪽에는 십대제자상이 새겨져 있다.

 

 

3. 신라 역사 과학관

석굴암은 신라 불교 미술의 걸작 중 걸작이지만 우리는 지금 석굴암 본존불을 유리창 바깥에서만 바라볼 뿐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 문화재에 행해진 약탈의 역사, 과학과 건축기법에 대한 연구 없이 제 멋대로 행한 보수의 역사 그 결과물이다.

 당시 석굴암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조사와 함께 전체 해체 복원이 결정되었다. 석굴의 돌을 모두 해체한 뒤 다시 쌓고, 유실된 돌은 콘크리트가 대신했다. 석굴암 암반 아래에 있던 샘물은 물을 모두 빼내고 물길을 차단해버렸다.

 콘크리트로 발린 석굴 내부는 숨을 쉴 수 없었고, 천연습도조절장치였던 암반 아래 샘물이 없어지자 석굴에 습기가 차고 이끼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의 잘못된 복원공사로 석굴암은 현재까지도 유리보호각 안에서 애처로운 찬란함을 보이고 있다.해서, 석굴암을 보러 가기 전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석굴암이 얼마나 위대한 불교 건축물인지 배울 수 있는 신라역사과학관. 제2의석굴암이라는 별칭을 가진 곳이다. 유리창 속에 갇혀 이끼, 습기와 전쟁을 치르고 있는 석굴암의 본존불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석굴암의 과학적 비밀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전시가 꾸려져 있다. 석굴암의 1/5 모형이 있는데, 석굴암 전실과 원실(주실)의 내부 구조를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

 

 

4. 경주 역사 유적지구 황룡사 지구 (#분황사, #황룡사지, #황룡사역사문화관)

 경주는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귀한 문화유산들이 전역에 산재해 있다. 이것을 증명하듯 지난 2000년 ‘경주역사유적지구’라는 이름으로 경주 시가지, 남산을 아우르는 영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시내권 유적인 월성지구, 황룡사지구, 대릉원지구와 보문관광단지 인근의 산성(명활산성)지구, 시가지 남쪽의 남산지구 등 5개의 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5개지구는 탑, 절터, 궁궐터, 왕릉, 불상, 산성을 비롯한 신라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수많은 문화유적을 품고 있다. 불국사권에서 시내권 쪽으로 이동하면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황룡사지구를 먼저 소개한다. 황룡사지구의 주요 유적으로는 분황사와 황룡사지가 있다.황룡사의 절터도 분황사 바로 옆에 있다.

 진흥왕 때부터 시작해 선덕여왕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건립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거대한 삼존불상을 모셨던 금당, 아파트 25층 높이(82m)에 달하는 황룡사9층목탑이 위용을 뽐냈다. 고려시대 몽골군에 의해 불타 없어져 현재는 광활한 대지에 건물터와 주춧돌 일부만을 확인할 수 있다.황룡사지와 함께 황룡사역사문화관을 함께 둘러보면 당시의 황룡사의 웅장한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다.

  황룡사지의 발굴조사와 복원 추진과정을 국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지난 2016년 11월 문을 열었다. 황룡사 건립부터 소실까지의 과정을 담은 3D영상 시청각실과, 발굴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한 신라역사전시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1층에는 황룡사 9층목탑을 1/10크기로 재현한 모형탑도 전시되어 있다.

 

 

5. 경주 역사 유적지구 월성지구 (#월성 #첨성대 #동궁과 월지)

 월성지구는 신라 천년의 역사를 아로새긴 왕궁이 있던 영역이다. 궁성이었던 월성, 왕자가 기거하던 별궁인 동궁, 그리고 첨성대까지 월성지구 안에서 둘러볼 수 있다. 월성은 현재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내무 건물지를 4구역(A-D)으로 나누어 차례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발굴과정을 모두와 함께 공유하고자 발굴현장 상시해설 프로그램 ‘월성이랑’을 운영한다.

하절기 매주 금요일에 월성을 찾으면 발굴현장에 직접 들어가 발굴조사 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도 있다.

 

 

6. 경주 역사 유적지구 대릉원지구

  12만 6,500㎡의 넓은 땅에 23기의 신라시대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을 중심으로 그 일대에 고분유적이 산재해 있다. 대릉원지구는 좁게는 대릉원을 일컫고, 넓게는 대릉원지구 노동·노서리 고분군, 대릉원지구 황남리 고분군, 대릉원지구 황오리 고분군(쪽샘지구)를 포함한다.

  대릉원 내부만 꼼꼼히 둘러보아도 제법 시간이 소요된다. 주목해서 보아야 할 고분은 제13대 미추왕릉과 거대한 표형분(쌍분)이 눈길을 사로잡는 황남대총, 고분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천마총이 있다. 고분 사이에 목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모습이 그림 같은 포토존도 놓치치 말아야 할 대릉원의 관람 포인트다.대릉원의 동쪽, 남쪽, 북쪽에 대릉원지구에 포함되는 크고 작은 고분군이 있다.

  먼저 동쪽에 황오리 고분군(쪽샘지구)이 자리하는데 발굴조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구역이다. 고분의 발굴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쪽샘유적발굴관도 있다. 대릉원의 북쪽에는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노동리·노서리 고분군이 있다.

  단일고분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봉황대가 노동리 고분군을 대표하고, 서봉총, 금관총 등이 있는 노서리 고분군은 피크닉 장소로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대릉원 남쪽에 분포된 황남리 고분군은 해질 녘 찾으면 멋진 풍경과 마주할 수 있다. 고분과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배경으로 붉게 물드는 석양에 눈을 뗄 수 없다.

 

 

7. 양동마을

안동의 하회마을과 함께 한국의 역사마을로 지난 2010년 8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반가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보여 주는 고가가 많다.

 마을의 주산인 설창산의 봉우리에서 네 줄기로 능선과 골짜기가 뻗어 내려와 물(勿)자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골짜기에 160여 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초가(草家)가 모여 있다. 양동은 산세와 지세가 명당 중의 명당이라 예로부터 재물과 인재가 모여들었다 한다. 그를 증명하듯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가 116명이나 나왔고, 우재 손중돈 선생, 회재 이언적 선생 등 명망 있는 관료와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주요 고택으로는 회재 이언적 선생에게 왕이 하사한 집 ‘향단’, 월성 손씨의 종택인 ‘서백당’(송첨종택),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이 기거하던 집 ‘무첨당’, 우재 손중돈 선생이 분가하여 살았던 ‘관가정’등이 있다.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양동마을 전통문화의 보존과 활용을 위해 ‘양동마을 전통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8. 옥산서원

2019년 7월, 전국 9곳의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옥산서원도 그 중 한 곳이다. 옥산서원은 동방오현 중의 한 사람인 조선시대 학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2년 건립되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곳의 서원 중 하나다. 서원 전면에 강학공간을 두고, 후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형적인 서원 건축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정문인 역락문을 통해 들어가면 누각 ‘무변루’가 보이는데, 누마루를 서원 건축에 도입한 최초의 사례가 바로 옥산서원이다. 정면에 강당인 ‘구인당’이 있고, 좌우에 기숙공간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자리하고 있다.

  구인당에는 두 개의 ‘옥산서원’ 편액이 걸려 있는데 강당 대청 전면에 있는 편액은 사액 받은 당시의 편액이고, 강당 전면에 걸린 편액은 조선 명필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다. 강학 공간 뒤에는 이언적 선생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을 비롯해, 신도비, 전사청 등이 배치되어 있다.

  옥산서원 바깥에는 너럭바위와 맑은 계곡이 어우러지는 ‘세심대’가 자리하고 있다. 물로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9. 경주최부자댁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경주 최부자’의 종가댁이다. 1700년 경 건립된 고택으로 건축 당시 이웃하고 있던 향교의 권위를 해치지 않기 위해 향교보다 세 자 이상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집을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정석적 형태이며 지어질 당시에는 99칸이었으나 현재는 큰 사랑채와 안채, 솟을대문과 곳간 등이 남아 있다.

  고택의 첫인상인 솟을대문부터 겸양의 미가 보인다. 일반적인 대감댁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소박하고 낮은 솟을대문의 모습이다.경주 최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 장군부터 12대 독립운동가 최준 선생까지 지조와 절개, 겸손과 포용의 미덕으로 이름값을 귀하게 만들었다.

  9대 진사를 배출하기도 했는데, 권력에의 탐닉을 막기 위해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가훈이 내려온다. 일명 ‘최부자 육훈’으로 진사 이상의 벼슬 금지를 비롯해,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 것,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흉년에 재산을 늘리지 말 것,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 등의 가훈을 지키며 올바른 부자의 정도를 걸었다.

 

 

10. 경주향교

  경주 최부자댁 바로 옆에 조선시대의 교육기관 경주향교가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교촌(校村), 교리(校里), 교동(校洞)이라 불리는 연유도 이곳에 향교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천년의 배움터이다. 신라 신문왕 2년(682)에는 한반도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세워졌던 곳이고, 이는 고려시대의 향학으로, 조선시대의 향교로 이어졌다.

  향교는 지방인재의 교육을 담당했던 교육기관을 말한다. 서원이 사립학교라면 향교는 공립학교에 해당한다. 경주향교 건물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3년(1600년)에 대성전을 비롯한 제향공간을 다시 짓기 시작했으며, 명륜당 등 강학공간은 광해군 6년(1614년)에 짓기 시작해 원형을 복원했다.

  매년 봄, 가을 전통적 유교제례의식인 석전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또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전통혼례과정을 시연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다도, 국궁, 투호 등의 전통문화 체험도 할 수 있다.

 

 

11. 석빙고

  조선시대의 냉장고를 보러 가는 길. 보물 제66호로 지정된 경주석빙고는 월성 안의 북쪽 성루에 자리하고 있다. 천여 개의 돌로 만들어진 얼음 창고로, 석실은 직사각형이고 천장은 돔 형태로 올려져있으며 출입문은 남쪽에 있다. 천장에는 공기구멍이 셋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고 경사를 만들었다.

  석빙고 출입문 이맛돌에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재신유(再辛酉) 추팔월(秋八月) 이기(移基), 개축(改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영조 17년(1741)에 옮겨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출입문이 닫혀 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문 바깥에서만 석실 내부를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니 서늘한 한기가 느껴져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이 나온다.

 

 

12. 경주읍성

신라 이후의 천년 경주를 상징하는 주요 유적인 경주읍성이다. 신라시대에는 월성이 중심이었다면 고려 이후에는 경주 읍성으로 중심이 옮겨졌다. 고려와 조선에 이어지기까지 행정, 생활, 군사기능이 모여 있던 경주의 심장부였다.

고려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래, 조선시대에 여러 번 고쳐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 복원된 모습은 조선 영조 21년(1745)에 중수한 모습이다. 영조 때 중수한 경주읍성은 성곽 둘레가 2.3km에 달했고, 동서남북에 성내로 통하는 사대문이 자리했다고 전한다.

  사대문은 모두 소실되었는데, 동문인 향일문은 최근 복원하였다.동쪽에 100여 미터 남짓 남아 있던 성벽을 이어 쌓고, 치성, 옹성, 동문 등을 복원해 2018년 11월 일반에 공개했다.

  차차 남은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 북문인 공신문까지 복원될 예정이다. 복원된 성벽과 향일문에는 야간경관조명이 설치되어 시내권 야경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13. 독락당

자연과 벗 되었기에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은 집,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낙향하여 7년 간 기거한 곳이다. 가옥의 사랑채를 독락당, 또는 옥산정사라 부른다. 옥산정사라는 현판은 퇴계이황의 글씨, 독락당 현판은 아계 이산해의 글씨이다. 독락당의 포인트 하나, 독락당에 딸려 있는 별당 정자인 ‘계정’이다. 이곳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의 풍광이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듯하다. 또 하나의 포인트, 독락당과 계곡 사이의 담장에 살창을 설치한 모습이다.

독락당에 앉아서도 계곡의 풍경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바깥 경치를 집안으로 끌어온 선조의 지혜가 엿보인다. 독락당에서는 고택스테이가 가능하다.

 

#출처. 경주시청 홈페이지 https://www.gyeongju.go.kr/

 

경주시청

 

www.gyeong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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